하나님의 기준을 회복하다. (에스겔 45장 9~17절)
(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너희는 공정한 저울과 공정한 에바와 공정한 밧을 쓸지니 (11) 에바와 밧은 그 용량을 동일하게 하되 호멜의 용량을 따라 밧은 십분의 일 호멜을 담게 하고 에바도 십분의 일 호멜을 담게 할 것이며 (12) 세겔은 이십 게라니 이십 세겔과 이십오 세겔과 십오 세겔로 너희 마네가 되게 하라 (13) 너희가 마땅히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 밀 한 호멜에서는 육분의 일 에바를 드리고 보리 한 호멜에서도 육분의 일 에바를 드리며 (14) 기름은 정한 규례대로 한 고르에서 십분의 일 밧을 드릴지니 기름의 밧으로 말하면 한 고르는 십 밧 곧 한 호멜이며 (십 밧은 한 호멜이라) (15) 또 이스라엘의 윤택한 초장의 가축 떼 이백 마리에서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드릴 것이라 백성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것들을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로 삼을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6) 이 땅 모든 백성은 이 예물을 이스라엘의 군주에게 드리고 (17)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
저는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떠들다가 혼난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혼나면서 가장 억울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쟤도 같이 떠들었는데 왜 나만 걸려서 혼나지?’ 싶을 때입니다. 법을 어기다 적발된 분들도 종종 이렇게 항변하곤 합니다. “나보다 더 심한 사람들도 많은데, 왜 엄한 사람을 가지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억울한 마음이 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바른 기준’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에스겔 45장 9절의 ‘너희에게 만족하니라’라는 표현은 ‘이제 그만해라,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라는 뜻으로, 그동안 저질러 온 착취 행위를 즉각 멈추라는 하나님의 단호한 명령입니다. 어쩌면, 당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도 이렇게 불평했을지 모릅니다. “내 전임자들은 훨씬 더 많이 착취했는데, 왜 하필 내 때에 와서 이러십니까?”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관직을 돈 주고 사고파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이 횡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관직을 사기 위해 들인 돈이 있으니, 관리가 된 후 백성들을 더욱 혹독하게 착취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웠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죄악을 준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지금까지 저질러 온 폭력과 강탈을 즉시 그치고, 이제는 바른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탐욕이 가득했던 지도자들은 저항할 힘조차 없는 과부와 고아, 그리고 이방인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힘과 권력은 약자를 보호하고 섬기기 위한 도구일 뿐, 자신의 탐욕을 채우거나 약자를 짓밟는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정확한 저울’, ‘정확한 에바’, ‘정확한 밧’을 반복해서 말씀하심으로써 ‘공의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숨 쉬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천 되어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정확한 저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예배를 드리지만, 직장과 사업 터, 그리고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부정직함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타협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만 검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 작은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진짜 신앙을 드러냅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참된 삶임을 깊이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학교 안에 ‘무인 매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신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컵라면과 초코파이 같은 간식들이 갖춰진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감시카메라도, 카드 단말기도 없었습니다. 그저 돈 넣는 상자 하나와 그 위에 적힌 문구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뿐입니다.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을 가진 그 단어가 돈통 위에 적혀 있었습니다. 과연 그 매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원우회가 운영하던 그 무인 매점은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고 늘 흑자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보다 훨씬 더 높아야 합니다. 우리를 통제하는 것은 눈앞의 감시카메라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기준’이어야 합니다. 에스겔 45장 16~17절입니다. ‘(16) 이 땅 모든 백성은 이 예물을 이스라엘의 군주에게 드리고 (17)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
백성들이 삶의 자리에서 공의를 지키며 얻은 정직한 소산물을 가지고 군주에게 나아옵니다. 그렇게 백성들이 정직하게 거둔 예물(에스겔 45장 13~15절)로 온 백성을 대표하여 군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에스겔 45장 17절). 부정직과 착취로 긁어모은 제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정직한 삶에서 흘러나오는 예물과 예배만이 공동체를 거룩하게 회복시키는 법입니다. 또한 본문을 보면, 예물의 양은 각자의 소유에 비례하여 정해집니다. 많이 가진 자는 많이,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평등한 원칙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단지 개인의 신앙 고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 공동체의 예배를 다 함께 세워 가는 거룩한 동역임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청파동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일의 은혜를 뒤로하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월요일을 맞이합니다. 크든 작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 주신 그 자리에서,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내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하루,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신실하게 감당하는 하루, 우리의 그 하루가 하나님께서 즐거이 받으시는 거룩한 예배가 될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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