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2026년 5월 20일(수) 똑! 똑! 똑! 아침밥 왔습니다.(고전 6:1~11)
    2026-05-19 21:02:32
    관리자
    조회수   33

    세상의 법이 아닌, 십자가의 법으로 (고린도전서 61~11)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샬롬! 지난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2026520일 수요일입니다. 이 시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61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세상의 법이 아닌, 십자가의 법으로>라는 제목으로 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갈등과 오해를 경험합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발생한 각자의 지식과 경험이 있기에 아무리 친한 관계라도, 아무리 은혜가 넘치는 교회 안에서도 오해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고린도전서 61~11)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은사로 충만한 교회였지만, 동시에 갈등과 분파로 몸살을 앓던 교회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교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그것을 세상의 법정으로 들고 가 서로를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그리스와 로마 사회는 이러한 법적 소송을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겼는데, 고린도 교인들 역시 세상 풍조를 따라 교회 안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에 소송과 고발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우리 청파동교회에서 가까운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가면 서부지법, 소위 말하는 서울 서부 지방 법원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곳에 한번 가 보신 적 있습니까?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 보신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웬만하면 안 가는 게 좋겠지요. 좋은 일로 가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전교회에서 사역할 때 그곳에 들어가 본 특별한 경험이 있습니다. 난생처음, 법원에 들어갈 때의 떨리는 마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 재판의 당사자도 아니고 방청객으로 가게 되었음에도 법정이 주는 그 두려움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무슨 일로 이러한 법정에 가게 되었는지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당시 제가 섬기던 교회는 비전센터라는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관 건축을 완공했는데, 이를 두고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코로나 전이라 건축비가 대략 20억 정도 소요되었는데, 일부 교인들이 자신들이 직접 건축비를 계산해 본 결과 17억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20억이 들어야 하는지, 교회는 당회, 제직회, 공동 의회를 통해 여러 번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인들은 자신들의 계산과는 달랐다며 반복적으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평당 건축비가 아파트 같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 100만 원이면 되지만, 교회의 경우는 같은 1층이라도 높이가 훨씬 더 높고, 건축자재가 더 비싸고, 소규모로 진행되기 때문에 대규모의 아파트 공사보다 건축비가 소폭 상향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이미 건축하기 전에 여러 전문가가 나와서 설명했음에 불구하고 결국은 세 분의 교인이 당회를 세상 법정에 고발했고, 이에 당회의 대표인 담임목사님께서 세상 법정에 피고의 신분을 서게 된 것입니다. 조금 씁쓸했던 것은 세 분의 교인이 고발한 것은 당회였는데, 법정에는 당회의 대표인 담임목사님만 출두했고 다른 당회원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고 방청객으로도 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당시 저는 부목사였지만 방청객으로서 뒤에 앉아 이 모든 재판을 참관했습니다. 자신의 순서가 되자, 목사님은 의연하게 나가서 직접 소명했습니다. 변호사를 고용하여 당당히 말할 수 있었음에도 목사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모든 상황을 직면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사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말 목사님은 예수님처럼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상황과 역할에 대해서 사실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재판은 무혐의로 판결 내려졌습니다.

     

    저는 그날, 이것이 바로 담임목사의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한 교회를 대표한다는 것이, 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다는 것이, 그저 주일날 설교를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최종 책임자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문을 닫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깐 정리하면, 지금도 법정은 아무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까다로운 법적 조문을 이해하려면 전문 변호사를 고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비용은 일반 노동자들의 인건비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금액입니다. 따라서 아무나 변호사를 고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하니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정말 어떠했을까요? 오직 부유한 권력층만이 이러한 법정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를 법정에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심정은 찢어질 듯 아팠던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과연 세상의 재판관 앞에 서는 것이 합당한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믿지 않는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받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인가?” 이러한 질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본문 고린도전서 61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을 때, 절대로 사회 법정에 나가지 말고 교회 안에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판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을 판단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과 함께 천사들도 심판해야 합니다. 하물며 그러한 존재가 세상의 심판을 받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되묻습니다. “그렇게 당신들이 똑똑하다고 하더니, 그렇게 당신들이 누구보다 지혜롭다고 하더니 당신들의 문제 하나 해결해 줄 재판관이 없어서 세상 법정에 나가 재판을 받습니까? 그러고도 당신들이 똑똑한 사람들이 맞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누가 이기고 지느냐를 떠나 믿는 성도가 믿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 재판받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교회 안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67절과 8절의 내용은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가, 믿는 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모든 다툼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송사는 그 자체가 실패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일단 송사가 일어나면 그것은 실패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강탈을 당할지언정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보복하려 하지 말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공정과 공평의 시대입니다. 절대 약자가 없고, 절대 강자가 없습니다. 그 결과 어떤 기관이든 민원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서비스 기관에는 대환장 민원 파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환장 민원 파티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요즘 뉴스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기가 막힌 민원들로 인하여 소풍도 갈 수 없고, 수학여행도 갈 수 없고, 운동회도 할 수 없고, 축구도 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가리켜서 어느 교사가 한 말입니다.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 깨우면 그 일로 인하여 자기 자식이 상처받았다며 정서적 학대로 선생님을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가 기분이 나빠 보이면 잘 헤아리지 못한 선생님 때문이라고 정서적 학대로 선생님을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것이 민원이 아니라, 징징 떼쓰는 것이다. 민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민원을 제기하는 방식이 문제다.’라고 여러 가지 대안들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당분간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바울의 해법은 우리에게 더욱 큰 영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의 희생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의를 당하고 강탈을 당할지언정 자신의 모든 권리를 찾으려 하지 않는 것, 누군가로부터 보복을 당할지라도 되갚아주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겪어야 할 십자가의 희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도 우리의 형제고 민원을 받아주는 사람도 우리의 형제입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처지입니다. 누군가는 이 미움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나로 인해 그 미움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모두가 공정을 말하고 공평을 부르짖습니다. 누구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 미움의 고리를 끊어내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