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 그 자체가 상급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1~18절)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샬롬! 지난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2026년 5월 27일 수요일입니다. 이 시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9장 11절부터 18절까지입니다. <헌신 그 자체가 상급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어제 우리는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특권이라는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어떠한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것이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생 헌신하고도 아무 소용 없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야 할 진짜 상급은 하늘에서의 상급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20절)’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한 하늘의 상급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1절부터 14절까지 연속적으로 자신이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는 것은 마땅한 권리임을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도 주의 일꾼들은 당연히 사례비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태복음 10장 10절)’ 이렇게 명백한 예수님의 명령이 있는데, 어느 누가 바울의 권리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린도전서 9장 15절 말씀입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사례비의 당위성을 이야기한 것은 이제라도 사례비를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차라리 죽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써본 일이 없습니다. 또 내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내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한다는 이 긍지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5절, 공동 번역)’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주의 일꾼들로 하여금 사례비를 받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맥락이 중요합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종말이 임박했다고 보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에 제자들로 하여금 (시간을 허투루 쓰지 말고) 오직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제법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 아리마대 사람 요셉, 베다니의 나사로의 가족들, 또 헤롯 궁정의 고관 부인들입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자들, 상류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당시의 사회적 여건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직접적인 복음 전파 사역에는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유가 없는 노예들도 마음은 간절히 원했지만, 직접적인 전도 활동에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이동할 자유가 있는 중산층들이 주로 전도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이 동네 저 동네로 파송하시면서 동네마다 거주하는 부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을 책임지게 했던 것입니다. 중산층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상류층은 그들을 물질로 도움으로써 함께 동역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선교비를 마련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신 너희들을 환영해 주는 집으로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복음 전파의 당위성만 생각하며, 무조건 사례비를 받으려 하거나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려는 것은 잘못된 성경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거주했던 고린도 지역의 상황은 도시마다 순회하는 철학자들이 있어 때마다 강연하고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바울도 그러한 철학자들처럼 도시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돈을 받았다면, 다시 말해 복음을 듣는 것이 무료가 아닌 유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앞선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면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그 지역사회로부터 돈을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생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돈을 받았다면, 결코 복음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철학자들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차별화하기 위해 복음을 무료로 선포하고 생계는 자기의 손으로 직접 해결한 것입니다. 바울은 때마침 특별한 ‘천막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죽도 함께 다룰 줄 알아야 했는데, 이 가죽을 다루는 작업은 가장 천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바울은 이러한 기술로써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무료로 전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지역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말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바울은 그렇게 자신이 피땀 흘려 복음을 전했을지라도 그것은 자신에게 조금의 자랑도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공동 번역)’
바울은 자신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만약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만큼 바울에게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예레미야의 소명이 담긴, 예레미야 20장 9절 말씀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역시 그런 핍박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9장 1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했는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했는가? 만일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했다면, 거기에 따른 보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했다면, 거기에 따른 보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내 자유로 이 일을 택해서 하고 있다면 응당 보수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자유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을 내 직무로 맡겨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7절, 공동 번역)’ 바울은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상급이 없다. 보수가 없다’라는 결론이 납니다. 그는 복음을 자발적으로 전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전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어떠한 보수도 상급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인 고린도전서 9장 18절에서 바울은 그런데도 만약 자신에게 보수가 있다면, 자신의 보수는 바로 이것이 말합니다. ‘그러니 나에게 무슨 보수가 있겠습니까? 보수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8절, 공동 번역)’ 그동안 사도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한 것, 복음을 선포할 때 돈 받지 않고 전한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보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일평생 아프지 않고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신앙 생활한 것, 누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 생활한 것,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상급이며 보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 우리의 상급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와 도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상급 역시 죽는 날까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누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 생활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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