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추정의 원칙 (민수기 35장 9~34절)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14)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16)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면 그는 살인자니 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17)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18)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그는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 (19) 피를 보복하는 자는 그 살인한 자를 자신이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면 죽일 것이요 (20)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21) 악의를 가지고 손으로 쳐죽이면 그 친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살인하였음이라 피를 보복하는 자는 살인자를 만나면 죽일 것이니라 (22) 악의가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23)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을 때에 이는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24)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복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25)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주할 것이니라 (26)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가면 (27) 피를 보복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피 흘린 죄가 없나니 (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29) 이는 너희의 대대로 거주하는 곳에서 판결하는 규례라 (30)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31)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32) 또 도피성에 피한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주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3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34)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샬롬! 지난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2025년 6월 10일 화요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민수기 35장 9절부터 34절까지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제목으로 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형사 소송법에 ‘무죄추정(無罪推定)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재판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모두 무죄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 제27조 제4항은,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피의자의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도피성(逃避城)’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고대사회는 피해당하면 일곱 배로 보복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누군가가 피해당하면 반드시 그의 가족이나 친척이 피해에 대해 보복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당시의 시대적 관점에서 볼 때 굉장히 혁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인은 또 다른 살인을,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낳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도피성 제도는 이러한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여, 인간이 인간에게 복수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제도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하나의 죄가 더 큰 죄로 확산하는 것을 막는 제도입니다. 도피성에 관한 내용은 오늘의 본문 민수기 35장뿐만 아니라, 신명기 19장, 여호수아 20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 두 번, 가나안땅에 들어간 후에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않도록 도피성에 관한 내용을 반복하여 주지(周知)하십니다.
본문 민수기 35장 9절부터 15절까지를 읽어보면, 도피성의 목적, 도피성의 개수, 도피성의 이용 자격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도피성의 목적은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민수기 35장 11절). 일단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에 들어가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판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면, 피의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민수기 35장 12절). 따라서 도피성의 장로들은 최대한 이 재판이 정당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쌍방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하여 어느 한쪽에 부당한 재판이 되지 않도록 재판정(裁判廷)을 운영해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피성은 오늘날의 유치장, 혹은 재판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가해자가 무죄판결을 받더라도 즉시 석방되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죽어야만 석방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대제사장의 죽음을 일종의 공소시효 만료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죄판결이 났더라도 도피성을 떠나면 보복하는 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민수기 35장 13절과 14절은 도피성이 모두 여섯 개라고 말씀합니다. 요단 서쪽에 세 개, 요단 동쪽에 세 개 이렇게 여섯 개입니다. 요단 서쪽에는 아홉 지파 반이, 요단 동쪽에는 두 지파 반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동쪽보다는 서쪽에 인구가 더 많았을 텐데, 양쪽에 똑같이 세 개씩만 둔 것은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20장 7절과 8절은 여섯 개의 도피성의 이름을 밝힙니다. 요단 서쪽에 있는 도피성은 게데스, 세겜, 기럇 아르바, 요단 동쪽에 있는 도피성은 베셀, 길르앗 라못, 바산 골란입니다.
민수기 35장 15절은 도피성의 이용 자격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도피성을 이용할 수 있었을까요? 다행히도 신분 계층, 남녀노소,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35장 16절부터 21절까지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입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사형을 시켰습니다. 도피성은 전적으로 부지중에 살인을 한 사람만을 위한 장소였습니다. 철과 나무와 돌 같은 연장을 사용하여 사람을 죽였을 때는 당연히 사형을 당했고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고의로 뒤에서 밀거나 물건을 던져 맞추거나 손으로 죽여도 반드시 사형당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고의성이 없어야 사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35장 22절부터 마지막 34절까지는 지금까지 내용의 반복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땅이 없는 레위지파에게 12지파로부터 조금씩 땅을 각출하여 모두 48개의 성읍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여섯 개가 도피성이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본문(민수기 35장 1~8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레위지파를 여러 지파 가운데 흩어져 살게 함으로써 민족의 하나 됨을 유지하고,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고, 도피성을 유지함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인권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무죄판결을 받은 피의자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까지는 집에 가지 못하고 도피성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 기간이 몇 년이 될 수도, 몇십 년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긴 기간 동안 거기서 무엇을 하였을까요? 한번 상상력을 발휘하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레위인들과 함께 도피성에 살면서 레위인들의 사역을 도왔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는 밥만 먹으며 집으로 돌아갈 날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레위인들과 함께 도피성을 관리하고 돌아보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처럼 도피성에 달려와 도움을 구하는 자들을 도왔을 것입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부지중에 살인한 자들에게 레위인들을 돕게 하고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돕게 함으로 스스로 그들이 참회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비록 실수로 일어난 일일지라도 그것이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을지 오랫동안 생각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로 꼽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값싼 회개, 셀프 회개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사과하기는커녕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하나님께는 회개하지만, 사람에게는 절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은 무료이지만,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대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금전적으로 보상해 주어야 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므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기가 더 어렵다는 말입니다.
죄라는 것은 쉽게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처럼, 죄에 대한 깨달음도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대부분 면피용일 때가 더 많습니다. 바라기는 도피성에 들어간 죄인처럼, 우리 자신의 죄를 깊이 묵상하고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용서를 구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잘 깨닫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나 같은 의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죄 된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깨닫고 은혜의 피난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다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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