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2025년 6월 18일(수) 똑! 똑! 똑! 아침밥 왔습니다. (시편 77편 1~9절)
    2025-06-17 20:29:35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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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규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시편 771~9)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 (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4)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5)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6)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1. 미술 작품에 문외한 사람이라 해도 뭉크의 대표작 절규라는 그림을 아실 것입니다. 핏빛의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화면 중앙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해골 같은 얼굴로 양손을 머리에 대고 뭔지 모르는 공포에 떠는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작품에 나온 이 절규하는 사람은 뭉크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는 평생 신경증과 우울증, 공황장애를 안고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그 원인은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폐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동생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아버지는 광신도로 어린 뭉크에게 매일 폭력을 일삼았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삶은 늘 불안과 공포, 절망으로 점철되었고 그 부정적 감정이 그의 작품에 잘 녹아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작품 절규가 오늘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경험, 곧 불안과 절망을 그림으로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2. 만약 오늘 본문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뭉크가 그렸던 절규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편 77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편의 기도자는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도와 달라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밤에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고 그의 고난에서 구원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어떤 위로도 받기를 거절했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773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여러분, 평소에 하나님을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가장 먼저 드십니까? 나를 도우시는 분, 나의 위로가 되는 분, 나를 사랑하시는 분. 하지만 오늘 시편의 기도자는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을 생각하면 오히려 불안과 근심이 생기고 심령이 상한다고 고백합니다.

     

    3. 그의 상한 마음은 이제 시편 777~9절에서 탄식과 절규로 고조됩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시편의 기도자는 하나님이 그동안 베푸셨던 은혜와 인자하심, 약속과 긍휼함이 여전히 유효한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의심하는 듯하고 하나님을 향한 섭섭한 마음과 원망스러움, 실망감이 드러나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던지는 기도자의 속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여전한 기대와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4. 오늘 시편 77편을 읽으며 떠오르는 사람이 입니다. 그는 고난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당한 고난은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모든 재산과 열 명의 자녀, 그리고 건강까지 욥은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 시편 77편의 기도자처럼 눈앞에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습니다. 기도의 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마음을 다했다는 증거다.’ 욥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주님 만나기를 열망했고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고, 그 고난에서 건져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극한 환난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사실 그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의 무응답때문이었습니다.

     

    5. ‘하나님의 진심이라는 책을 보면 저자는 욥의 고통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계속 찾는 고통 당하는 사람은 결국 특권적 지식을 얻게 된다오직 고통만이 열어 주는 문을 통과해 들어가서, 우리가 흔히 운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할 자격을 얻는다. (하나님의 진심, 173)” 우리 삶의 현실을 보면, 어떤 이는 이유 없는 불행을 당합니다. ‘절규를 그린 뭉크라는 작가처럼 주어진 삶의 환경과 가정 배경이 매우 불우한 사람이 또한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상황이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들을 던지게 됩니다. ‘왜 나는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을까?’ ‘왜 나는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정말 의로우시고 인자하신 분인가?’ 이와는 반대로 또 어떤 이는 노력 없이 큰 행운을 얻기도 합니다.

     

    6. 우리는 보통, 욥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을 당한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행운을 얻은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이야기를 통해 고통을 겪는 자를 연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존중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행운을 얻는 자들은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지혜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들만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 77편의 기도자에게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배웁니다. 오늘 우리가 시편 77편을 9절까지만 보았지만, 내일 살펴볼 후반부인 10~20절은 기도자가 이 고난을 통과하며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비록 그의 기도와 탄식이 하나님께 당장 응답받지 못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멀리하려는 것은 불신앙이지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알고자 품는 질문과 절규는 아름다운 시가 되고 기도가 됩니다.

     

    7. 오늘 아침 묵상을 함께하는 분 중에도 지금 당장 이유를 알 수 없는 문제로 깊은 절망의 늪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욥처럼, 그리고 오늘 시편의 기도자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데도 당장 응답이 없어 답답한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팔 복에서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우리 삶이 늘 평안하고 뜻대로 되면 우리가 절망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향해 절절히 부르짖을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생각지 못한 절망을 안겨 주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 오늘 시편 77편 본문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통과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주어짐을 반드시 기억하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길 바랍니다.

     

    기도문)) 하나님, 삶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만져주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시고 구원하여 주옵소서. 당장 하나님의 응답이 더딜지라도 지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는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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